[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1)

한국선교의 초석

최재건 | 기사입력 2020/12/11 [20:35]

[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1)

한국선교의 초석

최재건 | 입력 : 2020/12/11 [20:35]

▲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 새문안교회와 연세대학교를 설립했다.     ©편집인

 

 

 자손 4대와 더불어 한국을 섬긴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元杜尤·18591916)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한국으로 파송한 최초의 목사 선교사이다. 언더우드보다 앞서 1884920일 내한한 알렌은 평신도 의료선교사였다.

 

언더우드는 188412월 뉴욕에서 한국 선교의 장도에 올라 일본과 부산을 경유하여 188545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동승했던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는 갑신정변 이후의 시국불안으로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일단 일본으로 회항했다. 언더우드는 서울 도착 3일 뒤부터 알렌이 개원한 제중원에서 한국 선교 개척자의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191657세의 나이로 서거하기까지 30여년간 한국 선교를 위해 충성하였다. 한국명을 원두우로 지은 그는 또한 신촌 원씨의 조상이 됐다. 원두우 본인으로부터 아들 원한경, 손자 원일한, 증손자 원한광·원한석까지 4대에 걸친 자손들도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해 왔다. 그는 미국에서 가료 중에 하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의 유해는 아들, 손자와 더불어 양화진에 묻혀 있다.

 

그의 형 존 토머스는 뉴욕에서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트사를 세우고 사업에 대성하였다. 존은 막대한 재정 지원으로 동생의 한국 사역을 도왔고 세계 선교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원두우가 성경을 새로 번역하여 찬송가를 편찬해 낼 때 경비와 출판비도 지원했다.

 

동생 언더우드가 대학을 세우기 위해 오늘날 신촌의 연세대 부지를 매입할 때는 재정을 지원하여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언더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레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란 양화진 언더우드가의 비문처럼 실로 그의 가문은 대를 이어 몸과 마음과 물질을 바쳐 한국을 섬겼다.

 

한국 선교 개척의 최고 공로자

 

언더우드 선교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뉴욕에 정착한 후 뉴욕대를 졸업하고 뉴브른스윅신학교를 마쳤다. 언더우드는 19세기 말엽 미국 교회에서 해외 선교의 열의가 높을 때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애초 인도에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이후 한국 선교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자 한국이 그를 부른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5년 입항했던 당시 제물포항     ©편집인

 

 

1884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한국 선교의 장도에 오를 때 그의 형 존은 뉴욕에서 시카고까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며 전송하였다. 형을 돌려보내고 계속 기차 여행을 하던 중인 18841222일 그는 첫 선교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

 

언더우드는 26세에 내한해 한국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1908년에는 ‘The Call of Korea: political, social, religious’라는 선교체험기를 남기기도 했다. 한국 조정은 문호를 개방했지만 천주교 전파를 금지하고 있어서 개신교의 선교 역시 허용하지 않았다.

 

선교 활동이 불가했던 그는 제중원 교사로서 의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선교 활성화의 길을 모색하였다황해도 재령을 비롯한 북한 지역을 두루 답사하고 자급 자치 자전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선교정책을 세웠다.

 

선교 용어로 한글을 택하고 교회마다 야학을 세워 한글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한영사전과 한국어 문법책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한글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그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 4부 악보가 있는 찬송가도 간행하였다.

 

국민 지식의 증진으로 국가가 부강해지도록 그리스도신문을 간행해 국내외 뉴스, 각종 상식과 기독교 복음 기사들을 실었다. 그 외도 많은 저작 문서들을 간행했다.

 

그는 학교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갖고 고아 두 명으로 고아원학교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서울 경신학교와 연세대의 전신이 되는 언더우드학당이었다. 대학 설립의 비전 실현에 죽을 때까지 매진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세웠다.

 

병원 사업도 적극 지원해 그 자신이 제중원에서 가르쳤으며, 토론토의대 교수였던 에비슨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에비슨이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를 세우는 일을 도왔다. 두 사람은 평생토록 단짝이었다.

 

언더우드는 당연히 교회 설립에도 헌신했다. 새문안교회를 필두로 21곳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마펫 베어드 밀러 에비슨 외에 다른 많은 동료 선교사들의 한국 파송을 주선했고, 그의 형제들이 경제적으로 크게 지원하였다. 미국 남장로교와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할 계기를 제공하고 초기에 재정을 지원한 이들도 언더우드 형제였다.

 

언더우드는 191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이 되었으나 전체 생애 동안 교파를 초월한 연합정신을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외에도 YMCA 청년운동의 주춧돌을 놓는 등 많은 개척 사역을 펼쳤다. (계속)

 

최재건 교수=미국 예일대(M. A. & STM)와 하버드대(Ph. D.)에서 공부하고 연세대, 백석대 교수를 역임했다. 지금은 연세대 신과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조선 후기 서학의 수용과 발전, 근현대 부흥운동사', 한국교회사론, The Korean Church under Japanese Colonialism등이 있다.

 

▲ 최재건 교수(연세대 신과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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