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2)

박해의 땅 조선을 향한 열정

운영자 | 기사입력 2020/12/16 [15:02]

[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2)

박해의 땅 조선을 향한 열정

운영자 | 입력 : 2020/12/16 [15:02]

 

 

▲ 언더우드 선교사는 종교의 자유가 없고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미전도 지역’ 조선의 선교사를 자원했다. 젊은 시절의 언더우드(왼쪽)와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가 도착했던 제물포항 전경.     ©편집인

 

편안한 목회 사양, 고달픈 선교사의 길로

 

언더우드는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최고 최대의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그가 기독교 선교와 한국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더 연구·평가되고 널리 알려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 안에서는 물론 한국 교계나 관련 기관에서조차 무시되고 외면돼 왔다.

 

오히려 미제의 앞잡이로 몰리기도 했다. 북한의 '천리마'란 월간지에서 '언더우드 족속의 120년 행적'이란 제하의 글이 2008년에 약 1년간 연재되었다. 그 글에서 언더우드 가는 "독초마냥 뿌리를 내리고 5대에 걸쳐 선교사, 의사, 교육자, 해방군, 외교관 등의 허울을 쓰고 미제의 조선 침략을 위한 정책 수행에서 돌격대적 역할을 놀았다"(2008. 2월호·77)고 기술되었다.

 

언더우드의 공을 평가절하하려는 시각은 한국 사회에도 편만해 있다. 그러므로 본 연재를 통해 그의 선교 일대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어릴 적부터 신앙훈련을 받다

 

언더우드는 네 살 때에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어느 인도 선교사의 간증에 감동 받고 난 후의 일이었다. 장성하여 인도 선교를 지망한 것도 그때 받은 감동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선교의 꿈을 꾸며 그의 부친 토머스(Thomas Underwood)의 신앙교육 아래 경건한 신앙생활 훈련을 했다. 부친은 신앙의 가문으로서 선대로부터 이어온 경건한 신앙전통이 대를 이어 잘 계승되도록 영적훈련을 시켰다.

 

주일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집에서는 교회에서 들은 설교나 성경공부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히브리서 전체와 많은 성구들도 외우게 했다. 기도하는 것도 생활화했다. 언더우드는 외가 쪽으로도 와우(Waugh) 목사의 목회, 출판, 선교의 열정을 물려받았다. 부친과 친한 고아원 사업의 선구자 뮐러 박사에게도 영향을 받아 많은 영적 자산을 전수받았다.

 

그는 열 살 때 이러한 경건생활을 훈련하는 모습에 관해 감동적인 일화를 남겼다. 그는 형 프레드릭과 함께 프랑스 브룡 슈메르 지방의 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밤에 자기 전 기도를 했다.

 

기도하는 두 형제를 본 학우들이 놀리며 장난치고 방해했다. 며칠간 이런 일이 계속 되었지만 그들은 기도하기를 계속했다. 나중에는 그들도 감동하고 기도하고 취침하게 되었다. 두 형제의 취침 전 기도는 마침내 기숙사 전체로 확대되었다.

 

사명과 소명은 훈련 받은 자에게 주어진다. 그는 선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화란개혁파 교회의 신학교에서 신학 수업도 쌓았다. 거기에 더하여 1년여 동안 의학 공부도 했다.

 

부흥회에 참석하여 회중이 시편 103편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라는 구절을 읽다가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기도에 몰입하자 언더우드도 깊은 기도의 경지에 들어갔다.

 

이런 훈련과정에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란 말씀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형에게 선교사로 가겠다는 뜻을 밝히자 형은 자신의 타자기 회사에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선교사로 떠나는 것을 만류했다.

 

그에게 좋은 조건으로 목회할 자리도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모두 사양하고 초지일관 부르심 받은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다짐했다.

 

▲ 언더우드를 선교사로 파송했던 뉴욕 브루루클린 라파이에트 에비뉴에 위치한 뉴욕 브루클린 장로교회의 옛 모습     ©편집인

 

박해의 땅, 조선으로 향하다

 

그런 와중에서 되새긴 말씀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라는 구절이었다. 이 말씀은 그가 서구의 백인 우월 사상에서 벗어나게 했고, 후일에 한국 선교 현장에서 인종차별 의식을 초월하여 활동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해 동포주의적 기독교 사상의 바탕에서 선교했고, 여러 교파 선교사들과의 연합 정신을 강조했다.

 

언더우드는 신학생 때 조선에 사는 1300만명의 사람들이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것은 그를 한국으로 부른 음성이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병인박해로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송 받은 9명의 프랑스인 신부가 참수형을 당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평신도 천주교인들이 순교했다.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없었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했다. 사실상 선교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런데도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사로 가기를 자원했다. 18841222일쯤에 뉴욕을 기차로 출발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요코하마, 부산을 경유하여 18854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도착해 서울에 입성했다.

 

처음에는 뉴욕 브루클린 라파에트가 장로교회의 맥윌리엄스가 한국 선교를 위해 재정을 지원했다. 나중에는 그의 형이 후원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 가는 그의 부친이 영국 런던에서 잉크, 복사용 카본 사업으로 한때 번창했다. 나중엔 동업자의 자금 횡령으로 사업이 어렵게 되었다.

 

1872년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뉴욕에서 그의 아들 존이 설립한 언더우드타이프라이터 회사가 번창하여 부를 누리게 되었다. 언더우드 가는 사업에 재기했을 때도 부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재산은 하나님이 일시 맡겨두신 것으로 여겼다. 존은 그가 받은 물질적인 축복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의 재정위원장으로서 한국 선교의 개척자가 된 동생의 후견인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했다.@

 

최재건 전 연세대 교수(하버드 대,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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