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3)

편집인 | 기사입력 2020/12/20 [17:26]

[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3)

편집인 | 입력 : 2020/12/20 [17:26]

▲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언더우드 선교사는 노방전도에 힘썼다. 한국 입국 15개월 만에 첫 세례를 주기도 했다. 사진은 1898년 한국 최초의 자생적 교회인 황해도 소래교회를 방문한 언더우드 선교사(가운데)     ©폍집인

 

서울은 외국 세력들의 각축과 갑신정변 등의 정국 속에서 더한층 어수선해졌다. 같은 북 장로교 선교사인 알렌이 언더우드보다 6개월가량 먼저 내한했으나, 그는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이 선교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조정과 협약해 제중원(처음 얼마간은 광혜원이라고 불렸다)이라는 서양식 병원을 세웠다.

언더우드도 내한하여 제중원에 출근했다. 그는 의학도들에게 물리 화학 영어를 가르쳤다. 수술하는 알렌을 도와 하루 70여명의 환자도 돌보았다. 그는 여러 가지 기술과 의료지식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준비된 선교사였다.

언더우드는 내한한 지 3개월 되던 1885년 7월 6일, 미국 북 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그가 자기 집에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이 일은 예수교학당, 언더우드학당, 경신학교의 시원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교육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 의료선교는 선교를 시작하게 하는 추진력이 있었지만 선교를 발전시키는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교 설립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대학을 설립하려는 꿈도 있었다.

탁월한 언어 습득 능력

내한 이후 급선무는 한국어를 습득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한국어 선생은 일본 체류 중에 만난 이수정이었다.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원과 연계되어 체일(滯日) 중 도쿄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수정은 루미스 선교사 집에서 산상수훈을 보고 놀랐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동양의 5복과 예수님의 8복이 너무나 달라서 충격적이었다. 그는 마침내 세례를 받고 마가복음도 번역하였다.

▲ 이수정이 한글로 번역한 <마가복음>. 이수정은 일본에서 언더우드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편집인

 

언더우드는 한국으로 오면서 이수정이 한국어로 번역한 쪽복음 성경을 들고 입국했다. 이런 일은 선교역사상 경이적인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선교사가 현지에 가서 그 나라의 말과 글을 배우고 문법책 만들고 사전을 만든 후에 성경을 번역하는 순서로 이루어졌다.

언더우드의 한국어 선생으로는 이수정 외에 서광범 송덕조 등이 있었다. 송덕조는 프랑스인 신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불자전’ 편찬에 참여한 경력이 있었다. 언더우드는 어학 구사력이 출중했다. 프랑스에서 유학하여 불어를 구사하는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독일어와 신학연구를 위한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서구 고전어들은 한국어 성경을 번역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어학 습득을 위해 집중적으로 노력하는 열의를 지닌 사람이었다. 한국이 일본에 강점되어 일본어를 구사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일어 습득을 위해 도쿄에 가서 하루 8시간의 정규 과정의 수업을 받았고, 집에 와서는 또다시 가정교사에게 어학 훈련을 받는 집중력을 보였다.
 
그 무렵 대학 설립 문제가 많은 반대에 부딪치자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는데 어학 공부도 너무 급하게 많이 하여 일본어 소화불량에 걸렸다는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한국어 습득과정에서는 일화가 많다. 한번은 “없는 것이 없다”고 쓰인 어느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찾는 품목마다 그 가게에 있지 않았다. 주인에게 항의하자 “그러니 없는 것은 없다고 하지 않았소”라며 주인이 큰소리를 쳤다.
 
말의 뜻이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것을 알고 놀랐다. 또 한번은 모자를 사러 가서 “이것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인이 “갓이오”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그는 이를 ‘가시오’란 말로 알아듣고 얼른 뛰어나왔다.

노방전도에 힘쓰다

한국어 훈련을 1년간 하자 어느 정도 한국말 구사가 가능해졌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다운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설교도 하고 간단한 전도용 소책자도 간행하게 되자 약수터나 골목, 샛길에 가서 책을 읽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질문을 주고받았다.
 
가두(街頭) 대화는 발전하여 가두집회가 되었다. 큰 길거리나 동리에서 설교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밤에 나눈 사랑방 대화도 모임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노방전도나 사랑방 전도는 초기 한국교회 성장의 텃밭이었다.

언더우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1886년 7월 18일 세례를 베풀었다. 첫 수세자는 노도사, 곧 노춘경이었다. 수세자들에게 한문 사복음서와 ‘구령혼설’ 같은 전도 문서를 읽게 하였다. 성만찬에도 참석하게 하였다. 1885년 6월 21일부터 외국인들이 모여 예배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자 한국인들도 간혹 암암리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7년부터는 선교금령 속에서도 수세 지원자가 증가했다. 특히 황해도 소래에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청하러 온 이들 가운데는 “국왕이 우리를 처형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괜찮습니다”라고 하며 목숨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하여 작은 나무십자가를 등에 매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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