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4)

성경번역

편집인 | 기사입력 2020/12/27 [15:52]

[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4)

성경번역

편집인 | 입력 : 2020/12/27 [15:52]

▲ 아펜젤러 게일 레이놀즈 등 선교사들과 한국인 번역위원, 언더우드는 1887년 성경을 번역 출간하기 위해 한국상설성경위원회를 구성했다.     ©편집인

 

기독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종교이다. 언더우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돼라”는 성경 말씀에 순종하여 한국이 자기를 부른다는 믿음을 갖고 이 땅에 왔다. 그는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가 한국에 처음 입국했을 때 이미 성경의 일부가 번역되어 있었다. 일본에서 이수정이 마가복음을 번역한 ‘마가가 전한 복음서 언해’가 발행되었고, 만주에서 한국인들이 스코틀랜드인 로스 선교사를 도와 신약성경 전부를 번역한 ‘예수성교전서’가 발행되었다.

‘바늘 귀’냐 ‘바늘 눈’이냐

만주에서 로스를 도운 사람들은 그의 어학 선생인 이응찬을 비롯해 백홍준 김진기 등 6인의 청년들이었다. 그 후 언더우드는 내한한 지 1년여 만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이수정역의 마가복음서를 고쳐서 출간했다. 그는 이때 기존의 번역본을 사용할 것인지, 새로 번역하는 것인지를 두고 무척 많이 고심했다.

 

기존 번역본은 사투리와 한문 투가 심했고, 오역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 번역본을 일일이 고치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새롭게 번역하는 편이 낫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1887년 2월에 성경전서를 번역 출판 보급하기 위한 ‘상설성경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해 4월에 ‘한국상설성경위원회’로 개명하고 그 밑에 ‘번역위원회’와 ‘개정위원회’를 두었다. 1893년에는 ‘상설성경실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와 번역위원들이 가장 중시한 것은 기도였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혜를 얻기 위해 간구했다. 선교사들의 거취에 따라 번역위원들의 면면이 다소 달라졌다. 언더우드 외에 북감리교 선교사들인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존스, 북장로교 선교사 피터스와 게일,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 등이 공헌을 했다. 한국인으로는 김정삼 이원모 이승두 등이 한국어 성경 번역위원으로 큰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어학적 재능과 학습 집중력이 뛰어나 한국에 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어를 구사했고, 피터스는 그 자신이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이었다. 게일은 한글과 한문에 조예가 깊어 한국 고전 문학작품들을 영역하고 천로역정 등을 한역했다. 레이놀즈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서 뛰어난 히브리어 실력을 갖고 있었다.

번역 작업에는 애로도 많았다. 성경 원어에 해당하는 용어가 한국어에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위원들은 복음서 몇 구절을 가지고 하루 종일 토론하기도 했고, 한국인들과 논의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게일은 한국에는 ‘빵’도 없고 ‘양’도 없는데 이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결국 ‘빵’은 ‘떡’으로 번역되었고, ‘양’은 교회에서 흔히 쓰는 용어가 되었다. 그들이 ‘바늘 귀’냐 ‘바늘 눈’이냐를 두고 논쟁이 벌였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누가복음 18장 25절이 조선인의 주장을 따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로 번역되는 것으로 귀결되었지만 선교사들은 흠정역의 ‘eye of needle’에 따라 ‘바늘 눈’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되었던 것은 신에 대한 칭호를 ‘하나님’이냐 아니면 ‘천주’ 또는 ‘상제’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다수의 선교사들은 ‘하나님’으로 정하기를 주장하였고, 언더우드는 한동안 이 용어를 거부하였다.

 

▲ 1900년 이후 구약 성경도 분담하여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아펜젤러는 창세기, 언더우드는 시편, 게일은 잠언과 사무엘서, 스크랜튼은 이사야서, 레이놀즈는 여호수아서를 각각 맡았다. (사진_국민일보)     ©편집인

 

 

3차에 걸친 번역 작업

성경 번역과 출판은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번역위원이 각자 맡은 부분을 단독으로 번역하였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각 위원들이 번역한 본문을 동료 위원들이 함께 읽고 비판하고 제언한 후에 이를 바탕으로 그 위원이 다시 임시 번역본을 제출하게 하였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이 임시 번역본에 대한 독회를 열어 토론한 후 다수결로 채택하고 임시로 출판해 3년간 사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06년에 번역위원회가 각 개인의 것을 개정한 신약전서가 출간되었다. 이때 처음 간행된 성경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보다 비싸게 책정되었는데도 첫 2만여권이 모두 예약으로 팔렸다. 구약까지 완간된 것은 1911년에 이루어졌다.

언더우드는 누가복음과 시편의 일부를 맡았고, 번역 전체를 총괄하였다. 성경전서가 출판되었을 때 그는 성경 원어를 통달한 한국인이 나와서 더 완전한 번역본이 나오게 되기를 대망하였다. 성경번역위원회는 성경이 번역된 후 곧 성경개역위원회로 개칭해 존속되었다. 1911년 조선성서공회관이 건립되었을 때는 언더우드가 그 초석을 놓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번역위원회 위원장 직무에 충성했다.

 

아펜젤러도 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행 배를 타고 가다가 군산 부근에서 조난당해 순직했다. 그는 자기를 돕던 조한규를 구한 후 익사했다. 우리가 한글성경을 매일 보게 된 것의 배후에는 이처럼 충성한 이들의 헌신이 있었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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