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6)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1/07 [16:19]

[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6)

최재건 | 입력 : 2021/01/07 [16:19]

▲ 언더우드 선교사는 고아원 학교를 시작으로 교육 선교 활동을 펼쳤다. 사진은 1913년 덕수궁에서 열린 제1회 조선주일학교대회. 이 때 강사가 언더우드 목사(강단 위)였다. 언더우드는 1910년 고아학당의 규정을 담은 책을 발간했다. 국민일보DB     ©편집인

 

언더우드는 서구식 교육을 통해 한국 근대화에 공헌했다. 몇몇 소년을 모아 매일 아침 영어를 가르친 것이 시초였다. 그의 교육 사역은 한국에 온 어느 선교사보다도 먼저 시작되었다. 그는 1885년 7월 6일,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상황을 보고하고 제중원에서 알렌을 돕다가 건물을 구해 여건을 갖추면 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을 펼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아펜젤러는 그 다음달인 8월 3일부터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이화학당의 시원도 스크랜턴 부인이 1886년 5월 31일 어느 소실 한 명을 데리고 가르치기 시작한 데에 있었다. 이때는 영어교육이 주된 교과목이었다.

고아원에서 성경과 영어교육 시작

언더우드의 교육선교가 시작된 곳은 고아원이었다. 그는 1886년 2월 외무아문독판(外務衙門督辦) 김윤식을 통해 조선 정부의 교육사업 허가 통보를 받았다. 학생은 언더우드의 어학 선생이 데려온 고아 한 명이었다. 언더우드는 1886년 초 새 건물을 마련한 사실을 선교본부에 보고하면서 전도하여 기독교를 전하는 일이 불가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교육하는 일부터 실시해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의 허락을 받아 학교 사역을 준비한 후 1886년 5월 11일 개교하였다.

교실은 서울 정동에 있던 그의 사택 옆 한옥 사랑채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교육선교를 위해 기도를 많이 했다. 교육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기를 갈망했다. 아펜젤러도 1886년 6월 8일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란 명칭의 현판을 하사받아 정식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 역시 고아들이 첫 학생들이었다.

언더우드는 학교를 시작하면서 등록금은 받지 않았다. 전액 장학제도로 운영했으며, 먹이고 입히고 잠도 재우고 목욕도 시켰다. 변변한 목욕시설이 없어 고무 튜브를 사용했다. 한 번은 개학 후에 어느 아이를 목욕시키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에 여자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여학교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일은 정신여학교를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선교사들의 학교와 당시 조선의 서당은 어떻게 달랐을까. 언더우드가 가르쳤던 과목들은 국어 한문 영어 성경이었다. 학생들은 숙식을 같이 하면서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야 했다. 8시까지 세면과 방 청소를 한 후에 한문 공부부터 시작했다.

 

외국인 선생과 함께 아침 기도회를 가졌고, 그 후에야 아침을 먹었다. 오전에는 주로 암기 위주로 영어공부를 했고 이어 성경공부를 했다. 오후에는 다른 수업과 놀이, 한문공부를 하고 하루 일과를 끝냈다.

학생은 개교한 지 두 달도 안 되어 10명으로 늘었고 이후 25명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더 늘어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서양식 교육에 쉽게 마음 문을 열지 않았다. 온갖 소문만 들끓었다. 서(양)귀(신)들이 아이들을 키워 노예로 판다. 살찌도록 길러서 잡아먹는다, 염통을 빼어 약을 만들려 한다. 눈알을 빼어 사진기 만드는 데 쓴다. 남색을 즐기려 한다는 등 헛소문이 난무했다.

 

▲ 1885년 언더우드1세가 서울 정동 32번지에 세운 언더우드 고아원과 학당(사진_서울신문) ©편집인

 

 

고아원 학교에서 경신학교로

이 때문에 알렌은 언더우드의 교육선교 활동을 시기상조로 보고 제동을 걸었다. 선교본부도 적극적으로 교육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던 동료 선교사들 중에도 교육선교를 반대했다. 임금이 하사하는 학당 현판도 그들은 끝내 받지 못하였다. 결국 1897년 3년간 학교를 폐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반면 감리교선교회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들은 학당 현판을 하사받아 정부가 인가한 교육기관이 됐고 감리교 선교본부의 지원과 동료 선교사들의 호응을 받아가며 성장했다.

언더우드는 왜 고아원으로부터 학교 교육을 시작했을까. 조선 정부는 처음에 이 일을 사회사업으로 보고 설치를 허가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선교적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는 정부가 설립한 동문학(同文學)의 무상교육이 호응을 얻는 것을 보고 무상교육을 적용하면 학생들의 반응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당시 서울에는 고아들이 많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무상교육을 실시해 원대한 교육선교의 실마리를 풀려 하였다.

서구식 교육을 고아에게 적용한 사례는 조선에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구 선교사들이 시작한 교육은 대개 고아들을 돌보고 가르친 데서 출발해 비슷한 발전 과정을 거쳤다. 한국은 서구에 대한 인식이 늦어 청일전쟁 이후에야 서구문화와 서구교육을 받아들였다.

언더우드가 시작한 고아원 학교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예수교학당, 언더우드학당, 민노아학당 등의 이름을 거쳐 결국 경신학교로 발전하였다. 이곳에서 도산 안창호, 우사 김규식이 배출됐다.

 

오늘날 한국이 교육 대국으로 성장한 데는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공로가 지대하다. 그들은 문맹률이 높고 서민교육이 부재했던 구한말,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헌신하면서 한국의 백년대계의 초석을 놓았다.(계속)

 

최재건 전 연세대 신과대 교수(Ph.D. 하버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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