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상홍 교수의 인생론④ 다산의 애민사상

김상홍 | 기사입력 2021/01/20 [14:23]

[특별기고] 김상홍 교수의 인생론④ 다산의 애민사상

김상홍 | 입력 : 2021/01/20 [14:23]

 

▲ 다산의 애민사상과 공직자윤리: 목민심서     ©편집인

 

다산 정약용은 18년간 고난에 찬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민초들의 고초를 자아의 것으로 동일시하면서 병든 나라를 개혁하여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치열하게 선명했다. 다산의 애민사상을 요약한다.

 

목민사상. 다산은 원목(原牧)에서, “목민관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서 생존하는 것인가? 백성이 곡식과 베()를 바쳐서 목자를 섬기며 백성이 수레와 말과 종복을 내어서 목민관을 맞고 보내며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게 하니 백성이 목민관을 위하여 생존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아니다. 목민관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爲民有也)”라고 했다. 공직자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논리이다.

 

다산은 18C 후반과 19C 초반의 정치사회를 살려야할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고도(或生而致死之, 亦死而致生之) 오히려 태연하고 편안하게 여긴다고 통탄했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를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인데 이를 어찌 충신과 지사(志士)가 팔짱끼고 방관할 수 있겠느냐.”고 개혁의지를 밝혔다.

 

또한 공직사회를 백성들은 땅으로 농토를 삼는데 관리들은 백성들로 전답을 삼는다(民以土爲田, 吏以民爲田). 백성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으로써 농사짓는 일로 여기고 머릿수를 모으고 마구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써 수확하는 일을 삼는다.”고 폭로했다. 부패한 정치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백성을 중하게 여기고 국법이 존중되어야 한다.”(以重民生 以尊國法)고 정조(正祖)에게 건의했고, 공직사회를 개혁하여 공직자는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牧爲民有也)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산의 애민사상과 꿈

정치사회

진 단

或生而致死之

亦死而致生之

, 以土爲田

, 以民爲田

공직사회

진 단

 

 

 

개혁안

(처방전)

以重民生

以尊國法

, 爲民有也

公廉

개혁안

(처방전)

 

 

 

다산의 꿈

新我之舊邦

新朝鮮 創造

다산의 꿈

 

 

 

 

 

 

澤萬民 育萬物

 

 

다산은 상생(相生, Win-Win)을 추구했다. 두 아들(정학연, 정학유)에게 마음속에 항상 만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모든 사물을 기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此心常存, 澤萬民育萬物底意思)고 했다. 그의 꿈은 공렴(公廉)으로 오래된 조선을 새롭게 개혁”(新我之舊邦)하여 만백성을 윤택하게 하고(澤萬民) 만물을 육성하는 것(育萬物)”이다.

 

택만민 육만물의 꿈을 실현하고자 발상을 전환하여 차선책으로 개혁안을여유당전서에 남겼다. 다산은 택만민 육만물을 실천했기에 생시는 물론 사후에도 경세적(經世的)인 학문으로 높은 평가받고 있다. 다산의 꿈은 시공을 초월하여 공직자가 실현해야할 과제이자 지켜야할 아름다운 가치이다.

 

목민심서를 비롯한 일표이서(一表二書) 542권의 여유당전서는 병든 조선왕조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낡은 조선은 그의 선명을 수용하지 않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정치사상.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자 우리 백성들이 고르게 살도록 해 주는 것”(政也者, 正也. 均吾民也.)이라 했다. 주권재민의 사상을 가졌던 그는 천자(天子)도 민의(民意)에 의해 상향식으로 추대하는 것이라 하여 백성에 의한 정체(Government by the people)를 주창했고, 황제도 민의에 반하면 갈아치울 수 있다는 정치계약설을 전개했다.

 

행정사상. 행정사상은 공렴”(公廉)이다. 다산은 28세 전시(殿試)에서 갑과 2위로 합격했다. 이해 정월 27일 문과에 급제하여 희정당에서 정조대왕을 뵙고 물러나와 지은 시에서 무능해서 임무수행 어렵겠지만(鈍拙難充使)/ 공렴으로 정성 다해 충성하리라(公廉願效誠)”라고 다짐 했다. 그는 11년간 벼슬하는 동안 이 약속, 즉 공렴을 철저하게 지켰다. 공직자가 아무리 청렴해도, 행정에서 편 가르기와 이중잣대와 내로남불을 한다면 백성들에게 끼치는 피해가 부보다 때문에 훨씬 크다. 다산의 행정사상인 공렴은 시공을 초월하여 실현시켜야 할 시대정신(Zeitgeist)이다.

 

법사상. 법은 백성을 위한 법”(爲民之法)이어야 한다 정의하고, 예법일치(禮法一致)와 시의변통론(時宜變通論)과 죄형법정주의를 주장했다.

 

경제사상. 백성을 부유케 하는 것이 우선”(民富于先)이라 했다. 경자유전(耕者有田)과 지주제철폐, 사족(士族)의 생산자화, 근로부국론, 사농일치(士農一致)를 주장했다.

 

외교사상. 외교관은 양국간의 외교적 현안업무를 국익을 위해 처리하고 선린관계를 지속케 하는 본무 이외에 외국의 정보를 수집하고 선진문화와 문물을 수입해와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했다.

 

농업사상. 중농주의(重農主義)와 삼농주의(三農主義)를 주장했다. 다산은 황해도 곡산도호부사 재직(37, 1798)에 상소한 응지논농정소에서, 3농주의를 제시했다. 편농(便農)이니 농사를 편하게 질수 있게 해주고 후농(厚農)이니 농민들에게 이익이 나게 하는 것이며 상농(上農)이니 농민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다고 했다. 삼농주의는 시공을 초월하여 농정의 근간이 된다.

 

교육사상. 선교육 후형벌론”(先敎育 後刑罰論)천재와 수재의 특별교육론을 주장했다. 다산은목민심서에서 가르치지 아니하고서 형벌하는 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은 어린 아이들을 따로 뽑아서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이어서 고을에 천재와 수재가 있으면, 목민관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올 때 데리고 와서 교육시켜 큰 인물로 키워 국가에 바쳐야 한다고 했다. 이는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유배 18년 동안에도 교육을 포기하지 않고 서간과 가계(家誡)를 통해 자식들을 원격 교육했고, 또한 24명의 제자를 양성하였고 제자들과 함께 공동연구를 하여 책을 저술했다.

 

문학사상. 다산은 문학도 사회를 바로 잡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광제일세론(匡濟一世論)을 전개했다. 71(1832) 때에 문학 사대주의를 거부하고, 자신은 조선 사람이기에 즐거이 조선시를 쓴다(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고 하여 민족문학론을 전개했다. 그는 오랜 세월 시를 쓰면서 느낀 결론으로 다산은 다산의 시를 쓴다고 선언했다. 중국적 아류(Epigonen)의 문학사대주의를 버리고 조선시를 썼다.

 

다산의 목민심서를 비롯한 일표이서(一表二書) 542권의 여유당전서는 병든 조선왕조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청사진이었으나 낡은 조선은 선명을 수용하지 않아 망국의 길을 걸었다.

 

김 상 홍(단국대학교 전 부총장 ·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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