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건의 한국교회탐당]언더우드 이야기(9)

세 번에 걸친 북한 여행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2/02 [14:19]

[최재건의 한국교회탐당]언더우드 이야기(9)

세 번에 걸친 북한 여행

최재건 | 입력 : 2021/02/02 [14:19]

▲ 언더우드는 세 차례에 걸쳐 북한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나 소래교회 성도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평양과 의주 등을 돌아보며 복음 전파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사진은 1905년 건립된 황해도 소래의 선교사 휴양소.     ©편집인

 

 
언더우드는 한말에 서구인으로서는 최초로 이북 지방을 답사했다. 1886년 말 황해도 솔내(소래 또는 송천이라 부르기도 한다)의 서상륜이 찾아와 그곳 교회 상황을 알리고 세례받기를 원하는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요청했다.

언더우드는 이미 생겨난 교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선교를 위해 북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이용해 북한 지방을 돌아보기 원했다. 당시에는 외국인이 안심하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동료 선교사인 알렌으로부터도 많은 반대를 받았다. 산골에서 산적이나 맹수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음식은 물론 마실 물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래도 정한 때가 오기까지는 죽지 않도록 하나님이 계획하셨다고 믿었다.

그는 복음 전파를 향한 열의와 믿음으로 북부 지방을 탐사하는 여행을 준비했다.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장차 선교 거점으로 삼을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에도 1887년 3월 8일자 편지로 평양이 산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사실을 확인시키고 그곳에 선교지회(station)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의주, 개종자들이 몰려오다

마침내 언더우드는 1887년 11월 추수감사절 전에 북한 여행을 위해 출발했다. 기독교 소책자와 몇 가지 기본 약품들을 조랑말에 싣고 호조(護照)를 발급받아 첫 번째 북한 여행을 떠났다. 호조는 일종의 여행증명서였는데 이를 지방 관리에게 보여주면 조랑말과 침구, 엽전, 숙박 등 편의를 얻게 되어 있었다. 비용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나중에 계산했던 후불제도였다. 그는 송도 솔내 평양을 거쳐 국경지대인 의주까지 여행했다.

첫 방문지는 솔내였다. 그곳에는 서경조와 서상륜 형제가 선교사들의 손길이 미치기 전에 전도해 세운 한국 최초의 교회가 있었다.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서병조 외 3명의 어린아이와 백홍준의 처 한씨와 이성하의 처 김씨 등 7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국 최초의 유아세례와 성인세례식을 거행했다.

언더우드는 평양에서도 의외의 환대를 받았다. 당시 평양감사가 호의를 보여 말과 여행비를 보조했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찾아간 곳은 변경의 의주였다. 그곳이 서상륜 형제를 비롯한 여섯 의주 청년들의 출신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청년들은 만주의 우장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 선교사들의 성경 번역을 돕고 번역된 한글성경을 사람들에게 배포하며 전도해 교회를 세웠던 신앙의 선구자들이었다.

의주에서는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개종을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광경을 본 언더우드는 이곳을 중요하게 여겼다. 수년 뒤 마펫과 게일 선교사도 이곳을 방문해 선교 가능성을 탐지하고 언더우드의 선견지명에 공감했다.

▲ 존 로스 선교사와 최초의 한글번역 신약전서(사진_국민일보)     ©편집인

 


환대 속의 북한 여행

염려 속에서 시작한 여행이었지만 그는 예상치 않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동하다 하루에 몇 차례씩 쉴 때는 책을 팔고 설교도 했다. 그러나 숙박시설이나 음식 때문에 고생을 겪기도 했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여인숙이나 가정집 사랑방은 너무나 비위생적이었다. 밤에 온돌방에서 자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데 주인이 군불을 너무 많이 때는 바람에 마치 난로 위에 자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나 빈대, 벼룩의 공격에 잠을 자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때의 경험들은 이후 지방 여행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토대가 됐다.

두 번째 북한 여행은 1888년 4월 시행했다. 이때는 일본에서 같은 배를 타고 함께 제물포까지 왔던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가 동행했다. 언더우드는 이번에도 솔내에 들려 세례를 주었다. 지난 여행으로 만난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어떤 주민은 옷소매에 감자 부침개까지 싸가지고 와 그에게 주었다. 그는 위장이 나빴지만 모두 먹었고 배앓이를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여행은 중도에서 포기해야 했다. 조선 정부의 선교 금령 통지를 받은 선교회와 미국 공사관이 그들에게 즉시 서울로 돌아오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금령이 내려진 것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정부의 건축 중지 명령을 어기고 덕수궁에서 높이 바라보이는 성당을 명동에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궁궐보다 높게 성당을 짓는 일로 은밀히 행하던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이후에 제재를 받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제재에도 불구하고 전도 열정은 계속 타올랐다. 정부 경영의 육영공원에서 가르치던 서양인 교사들이 사직하자 언더우드는 정부로부터 그 학교의 책임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를 가르칠 자유가 주어지면 하겠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세 번째 북한 답사는 신혼여행을 기해 이루어졌다. 그는 두 번의 여행 경험 덕분에 한층 효율적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그의 여행 경험은 후임 선교사들의 길잡이가 됐다.
 
최재건 전 연세대 신과대 교수(Ph.D. 하버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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