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건의 한국교회탐당]언더우드 이야기(10)

성경공부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2/17 [11:32]

[최재건의 한국교회탐당]언더우드 이야기(10)

성경공부

최재건 | 입력 : 2021/02/17 [11:32]

▲ 언더우드는 1890년 자신의 집 사랑방에 성경공부반을 개설했다. 국민일보DB     ©편집인

 

 

언더우드는 남달리 뛰어난 선교적 안목과 열정을 가졌던 선교사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선교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없었고, 선교이론에 밝은 이론가도 아니었다. 과연 한국 선교는 어떤 방법과 정책으로 해야 할 것인가. 그는 효율적인 한국 복음화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1890년 6월 네비우스(John Nevius)를 초빙했다.

 

네비우스의 3자원리를 선교정책으로 채택

네비우스는 중국 산둥성 지푸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노련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다. 그는 오랜 헌신과 많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선교 방법’이란 논문과 책자를 간행,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2주간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그 나름의 선교방법을 제시하였다. 한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그의 주장에 호응하고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를 흔히들 ‘네비우스 방법’이라고 부른다.

당시 언더우드가 정리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각 사람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그곳에 남아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며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진다. 둘째, 교회의 운영과 방법, 기구를 각 교회가 관리하고 경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발전시킨다. 셋째, 교회가 자체적으로 인력과 재력을 제공할 수 있는 한 훌륭한 자격이 있는 사람을 뽑아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맡긴다. 넷째, 자신들의 예배당을 스스로 건축하도록 독려하고, 그 지방의 건축양식에 따르게 하며 각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예배당을 짓게 한다.

이 내용을 압축하면 자전(self-propagation) 자립(self- support) 그리고 자치(self-government)가 된다. 즉 한국인이 스스로 전도하고 재정도 스스로 담당하고 교회 운영도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이었다.

 

▲ 존 네비우스(1829-1893)(사진_ Wikipedia)    ©편집인

 


언더우드는 이 선교 방법을 채택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네비우스의 강연 이전부터 이미 자력 선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이 정책이 뿌리내리게 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솔내의 교인들이 한국 최초의 예배당인 솔내교회를 지을 때 그를 찾아와 예배당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언더우드는 이 선교정책에 따라 “당신들이 스스로 직접 예배당을 건축하십시오”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예배당을 건립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신도들이 수적으로 불어나고 그들의 믿음이 성장한 후에야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의 새문안교회도 철저하게 교인들의 헌금, 노력, 봉사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런 선례들을 좇아 이 정책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성경공부 열풍이 신학교로 발전

자력전도 외에도 네비우스가 강조한 것은 성경공부였다. 처음에 이 정책이 펼쳐질 1890년 무렵에는 전국의 장로교와 감리교 신자들을 다 합해도 100여명 정도밖에 이르지 못했다. 언더우드는 1890년 가을 자기 집 사랑방에서 성경공부반을 개설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7명이었으나 1892년 16명으로 늘어났다. 갑오개혁이 시작되는 1894년 전후 시기부터는 전도의 문이 열려 개종자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교회당이 생기는 곳마다 한글공부와 성경공부가 강조됐다. 특히 선교사들이 때맞추어 선교지회(station)를 개설한 북한 지역에서 호응도가 높았다.

기독교의 복음을 먼저 깨달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 선생의 역할을 하였다. 그들을 지도자로 선정하고 훈련에 참여하게 하여 공동체의 감독과 관리자의 역량을 배양시키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중에서 탁월한 사람들을 해당 지방에 있는 여러 공동체의 지도자로 세웠다.

그들은 각 지방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선교사들은 이런 단위를 총괄하는 대규모 성경공부 모임을 형성했다. 지도자들을 위한 특별한 훈련과정도 개설하였다. 이것은 동기, 하기, 혹은 1∼6개월 과정의 사경회였다. 이 과정이 발전해 더 엄격하게 장기적으로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신학반이란 특수 교육과정이 생겨났고, 마침내 1900년에 이르러 평양에서 장로회신학교가 시작됐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따라 자력에 의해 세워진 교회당 모습은 서양 교회당들과는 사뭇 달랐다. 규모도 작았지만 대부분 전통적인 초가집, 기와집 양식으로 지어졌다. 아름다운 건축학적인 유물은 별로 남기지 않았지만 눈물과 봉사와 헌신에 의한 교회당의 자력 건립은 한국 기독교의 발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하였다.

3자원리는 한국 교인들이 규칙적으로 헌금하게 하고 전도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열정을 발현시켜 한국교회를 급격하게 성장시켰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신학교에서 교역자를 양성할 때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교육 수준을 서구의 기준대로 하지 않고 평신도보다 약간 높게 하도록 결정했는데 이는 초기 문맹률과 교육열이 낮았을 때에는 통했으나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의 지적 저하를 초래하였다는 후대의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됐다.(계속)

 

최재건 전 연세대 신과대 교수(Ph.D. 하버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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