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상홍 교수의 인생론⑥ 다산의 도덕적 완전주의 삶

김상홍 | 기사입력 2021/02/25 [14:41]

[특별기고] 김상홍 교수의 인생론⑥ 다산의 도덕적 완전주의 삶

김상홍 | 입력 : 2021/02/25 [14:41]

 

▲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자료_You Tube)     ©편집인

 

다산 정약용은 도덕적 완전주의자(moral perfectionist)였고 청렴했다. 표리가 일치한 깨끗한 삶을 살았기에 목민심서에서 공직자는 공렴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세계를 보자.

 

다산 부인 홍혜완은 훔친 호박죽을 먹지 않았다. 다산이 경의진사로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23, 1784)이다. 성균관에서 장마로 10일 만에 집에 와 보니, 어린 여종이 부인 홍혜완(洪惠婉, 17611838)에게 회초리를 맞고 있었다. 당시 부인은 24세였고, 장남 정학연(1783. 9. 12)이 아직 돌도 안 된 아기였다. 식량이 떨어지자 어린 여종이 굶는 주인마님과 젖먹이 아기에게 충성하려고 이웃집 호박을 훔쳐다가 죽을 끓여 드렸으나 부인은 먹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 호박을 도둑질을 하랬느냐고 여종에게 회초리를 쳤다.

 

다산은 이를 노래한 시 남과탄에서 만 권 서적 읽었으나 어찌 아내가 배부르리오/ 밭 두어 이랑 있었던들 여종은 깨끗했을 텐데라고 했다. 이 시에 부인의 깨끗한 인품과 가난한 청년 다산의 고뇌와 지적 갈등과 정직함이 나타나 있다. 이런 부인의 고매한 인품과 청렴이 있었기에 다산은 18년의 엄혹한 유배를 극복하고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 부인은 내조의 여왕, 내조의 달인이다. 젊은 날의 부끄러운 초상을 시로 형상화한 용기와 고백에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이기 전에 인간 다산의 진솔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의 시가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은 티끌만한 가식이 없고 청징함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기생들과 놀아서 아들이 죽었다고 자책했다. 다산이 30(1791) 때 진주목사인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을 찾아뵈었다. 이때 4월에 3남 구장(懼牂)이 세살로 요절했다. 다산은 네가 병마와 싸우며 고통 받을 적에/ 애비는 즐겁게 질탕히 놀았느니라/ 배타고 북치며 물놀이 하고/ 기생 이끌고 촉석루에서 놀았노라/ 방탕했으니 재앙 받는 것 마땅한 일/ 어찌 너를 잃는 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억여행)”라고 참회했다.

 

어린 아들이 병마와 싸우며 신음하는 줄 모르고 촉석루와 남강에서 기생들과 파티를 한 방탕한 생활로 하늘이 노해서 아들이 죽는 재앙을 받았다고 자책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137일간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 다산은 너무 궁핍했다. 1801년 신유사옥으로 227일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를 떠났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같은 해 1020일 장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황사영 백서사건과 무관함이 밝혀졌지만 115일 출옥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2년차인 1802217일 두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내가 입고 있는 옷은(吾所著衣) 지난해 101일에 입은 것이니(乃去年十月初一日所服) 어찌 견딜 수 있겠느냐(豈可堪耶)”라고 했다.

 

다산은 1801101일 장기 유배지에서 입은 옷을, 강진 유배지에서 위의 편지를 쓰던 1802217일까지 무려 4개월 17일 동안, 137일 동안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 편지가 오고가서 고향에서 새옷이 도착할 때까지 적어도 150여일 동안, 5개월을 옷 한 벌로 지내면서 유배생활의 곤고함을 극복했다,

 

▲ 다산이 유배시절에 쓴 미공개 시(사진_연합뉴스)     ©편집인

 

 

다산은 유배지에서 자식교육으로 내일을 도모했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된 지 2년차인 18024월에 장남 정학연(丁學淵)은 처음으로 찾아왔다. 두번째 찾아간 것은 3년 후인 180510월인데 이때 다산이 쓴 시를 보면 눈물겹다. 아들이 금년에 마늘을 심었더니 마늘 크기가 배만해서산골 시장에 마늘을 내다 팔아 그 돈으로 노자를 했다는 말을 듣고 처절하여 더 이상 묻지 않았다.

 

3년만에 부자 상봉의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아들의 거처와 식사를 해결할 길이 없어 부자가 보은산방에 찾아갔다. 혜장선사(惠藏禪師)의 배려로 보은산방에서 겨울동안 머물면서 아들에게 내가 주역과 예기를 가르쳐 줄 것이니/ 돌아가 네 아우의 스승이 되거라라고 했다. 다산은 유배의 역경 속에서도 아들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때 문답 내용을 정리한 승암문답52조가 있다.

 

다산의 둘째 아들은 8년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다산의 차남 정학유(丁學游)8년만에 처음으로 아버지를 찾아 강진 유배지에 갔는데 1808420일이다. 이때 쓴 시에서 용모는 내 아들이 분명한 데/ 수염이 나 다른 사람 같구나/ 집 소식 비록 가지고 왔지만/ 아직도 내 아들인가 못 믿네라고 했다. 다산이 유배된 1801년에 둘째 아들 정학유는 15세였다. 8년이 지나 수염이 난 23세의 아들을 보고 아들인지 믿지 못하겠다고 유배의 아픔을 핍진하게 형상화했다.

 

다산은 꿈에서도 미인의 유혹을 물리쳤다. 다산은 유배 9년째가 되는 1809(48) 116일 밤 다산초당에서 자는데 꿈에 미인이 나타나 유혹했다. 마음의 동요가 있었으나 손 한번 잡지 않고 시 한 수를 지어주고 고이 돌려보냈다. 꿈을 깨고 나서 미녀에게 써준 시를 시집에 기록했다.

 

눈 덮인 산속 깊은 곳에 한 송이 꽃이 雪山深處一枝花

복숭아꽃과 붉은 비단처럼 아름다워라 爭似緋桃護絳絲

내 마음 이미 금강석과 쇠가 되었는데 此心已作金剛鐵

풍로가 있다한들 어찌 내 마음 녹이리 縱有風爐奈如何

 

다산이 꿈속에서 미인의 유혹을 뿌리친 것은 평상시의 내면세계가 극기와 결백성, 도덕성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산은 꿈속에서도 도덕적 완전주의를 실천했다. “평소의 삶꿈속의 삶의 세계는 자기완성으로 일원적(一元的) 이었다. 표리가 일치한 삶을 살았다.

 

다산은 아들에게 근검(勤儉) 2자를 유산으로 주었다. 다산이 유배 10년차인 18109월 아들에게 보낸 가계(家誡)에서 내가 벼슬은 했으나 너희들에게 물려줄 전답은 없고 오직 두 글자의 부적이 있다. <중략> 한 글자는 부지런할 ()자요, 또 한 글자는 검소할 ()자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 나은 것이라서 일생 동안 수용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다산은 11년간 벼슬을 했으나 청렴하여 자식들에게 물려줄 전답이 없었다. 가난했던 그는 勤儉”(근검) 2자만을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긴다는 청빈한 생활이었지만 정신세계는 청징했다.

 

다산은 혹독한 유배를 살면서도 정도(正道)를 걸었다.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된 지 10년이 되던 1810년 봄에 장남 학연(당시 27)이 의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다산은 대노(大怒)했다. 시학연가계(示學淵家誡)는 서간 26통과 가계 9통 중 가장 격렬하다. “네가 그 의술을 빙자해서 요즘의 재상들과 교의(交誼)를 맺어 너의 아비가 죄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도모하려는 것이냐? 옳지 못한 일일 뿐만 아니라 또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중략> 의원을 계속하면 살아서는 왕래하지 않고 죽어서는 눈을 감지 않겠다고 했다. 의술로 재상들과 교유를 맺어 아버지를 유배에서 풀려나게 하려한다면 부자의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다산은 역경 속에서도 올곧게 정도를 걸었다.

 

다산은 11년간 벼슬을 했으나 가난했고 청빈했다. 그러나 정신세계는 청징(淸澄)하고 꼿꼿했다. 이런 도덕적 완전주의를 추구한 삶과 철학이 있었기에 목민심서에서 목민관들에게 청렴을 요구할 수 있었고, 낡고 병든 나라를 혁신할 수 있는(新我之舊邦) 개혁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김 상 홍(단국대학교 전 부총장 ·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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