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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5)

한글보급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1/02 [16:42]

[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5)

한글보급

최재건 | 입력 : 2021/01/02 [16:42]

▲ 언더우드(맨 왼쪽)는 선교활동에 한글을 공식 언어로 정하고 영한사전과 성경공부 교재 등을 출간했다.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서울선교지부 선교사들과 언더우드 가족이 모였다.     ©편집인

 

 

한글이 빠르게 보급된 이유는 선교사들의 공이 크다. 한글을 선교활동의 공식 언어로 사용했고 성경을 한글로 출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는 한글이 보급됐고 한글이 보급되는 곳에는 기독교가 전해졌다.

국어학자 최현배(1894∼1970) 박사는 기독교 때문에 한글이 살았고 한글 때문에 기독교가 빨리 전파되었다고 말했다. 한글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문자로 인정받은 것도 언더우드와 제임스 게일(1863∼1937) 등의 선교사들이 그 우수성을 널리 홍보한 데서 비롯됐다.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이 쉽게 글을 쓸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했으나 조정에서 사용하지 않았고 민간에서 대중화되지 못했다. 한글은 1801년 신유년 천주교박해 때 공문서에서 처음 사용됐다. 당시 가톨릭 교인들이 교리 공부를 위해 일반인보다 한글을 더 잘 숙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이 한문과 한글로 전국에 천주학을 믿지 말라는 내용의 ‘척사윤음’이란 반포문을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리델을 비롯한 프랑스인 신부들이 ‘한불자전’을 만들었다. 이 사전은 어느 순간에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박해시대의 어려운 상황에서 은밀히 제작됐는데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의 한국어 공부와 성경번역에 도움을 주었다.

개신교에서는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존 로스가 한국어 입문서인 ‘Corean Primer’(1877)를 처음 펴냈고, 그의 동료인 매킨 타이어가 ‘Notes on the Korean language’(1879)를 간행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한글 연구와 대중화 작업은 언더우드가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처음 한글을 접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알아차렸다.

 

그는 한글을 선교용어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성경 찬송가 전도문서 신문 기타 기독교 서적을 모두 한글로 간행했다. 서민들이 쓰는 한글이 기독교 복음 전파에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를 한글의 재창조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어 문법과 영한 한영사전의 출판

언더우드는 한글을 언어학적으로 연구해 서구 세계에 이를 발표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에서 출판된 선교사들의 문법책과 사전을 참고하고 동료들과 어학선생의 도움을 받아 내한한 지 1년도 안 돼 문법책을 거의 완성했으며, 3년여에 걸친 편찬작업 끝에 두 권의 책을 1890년 요코하마에서 출간했다. 당시 서울에는 인쇄소가 없었다. 그는 거기서 한글 활자가 없어서 활자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직접 한국어 활자의 지형을 떴고, 교열을 보고 감독하는 고역도 치렀다.

 

▲ 언더우드가 한글을 언어학적으로 연구해 처음 발행한 한국어 문법책 <한어문전>     ©편집인

 


이런 산고 끝에 처음 발행한 책은 문법책인 ‘한어문전’이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 총 425쪽이나 됐다. 이 책은 후임 선교사들에게 한글 공부의 길잡이가 됐다. 두 번째로 발행한 책은 ‘한어자전’(영한사전)이었다. 1부와 2부로 구성돼 있었는데 1부 한영부는 197쪽이었고, 2부 영한부는 97쪽이었다.

사전을 출판하는 경비는 600∼700달러가 소요됐다. 대부분 선교사들은 그런 거액을 들여 사전을 만드는 것을 시기상조라고 생각해 그 일에 찬성하지 않았다. 선교지에서 겨우 4년을 보낸 어학 실력으로 문법책과 사전을 만드는 것에 그들이 의구심을 품고 반대했던 것은 그럴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선교부가 부담해주지 않으면 모금을 해서라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그 일을 강행했다.

 

다행히 선교본부의 미첼(Dr. Mitchell) 총무 내외가 내한해 지원을 약속해줬다. 출판이 되자 동료들이 놀랐고 그 책은 그 후 25년간 애독됐다. 영한부는 1915년에야 후손들에 의해 약간 보완됐으며, 한어자전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애용하는 각종 영한사전들의 효시가 됐다.

전도문서와 성경공부 교재 간행

1894년을 전후로 한국 내 선교활동은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노방전도와 사랑방전도에 힘쓰며 복음을 전했다. 여기서는 전도문서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묘축문답’ ‘구령혼설’ ‘진리이지’ 같이 한문으로 된 전도지를 가지고 전도했다. 나중엔 전도지를 번역해 쓰기 시작했다. 그는 ‘성교촬리’와 ‘상제진리’를 발행했고, 1891년에는 네비우스 부인의 ‘기독교 문답(Christian Catechism)’을 ‘예수교문답’이란 제명으로 출간해서 사용했다. 1893년에는 같은 책자를 ‘그리스도 문답’이라고 고쳐서 사용했다. 1894년에도 ‘복음대지’ ‘부요록’ 삼위일체를 설명한 ‘삼요록’ 등을 번역했다.

아펜젤러와 같이 집필한 ‘예수행적’이란 전도지도 활용했다. 1894년에는 언더우드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에 대해 쓴 ‘복’이란 문서를 만들었다. 성경공부용 서적은 다른 필자의 저서들을 번역하거나 그가 직접 집필해 사용했다. ‘모세 제도의 공과’와 ‘요한공부’ 등이 그것이었다.(계속)

 

최재건 전 연세대 신과대 교수(Ph.D. 하버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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