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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7)

새문안교회의 창립

최재건 | 기사입력 2021/01/20 [14:49]

[최재건의 한국교회 탐방] 언더우드 이야기(7)

새문안교회의 창립

최재건 | 입력 : 2021/01/20 [14:49]

▲ 새문안교회는 1887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방에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됐다. 1910년에는 자립으로 벽돌 건물을 세우고 1500여명이 모여 헌당예식을 가졌다.     ©편집인

 

언더우드는 국내에서 가장 먼저 한국인에게 세례를 주고 조직 교회를 설립한 선교사였다. 한국 근대화를 이룩한 공적은 교육,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된 목표는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였다. 조정의 천주교 박해를 의식하고 금교정책을 따라가는 선임 알렌과의 마찰도 세례를 비롯한 전도 활동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생명을 걸고 수세를 원하는 자들에게 세례 베풀기를 주장했다. 중국에서도 모리슨 선교사가 정부의 금교 제재를 풀기 전에 세례를 베푼 예를 들었다. 한국에는 세례받기를 원하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안 그는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외국인들뿐이었지만 1885년 6월 21일, 언더우드는 이들과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 모임에 언제부턴가 한국인들도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암암리에 1886년 7월쯤 노춘경(노도사)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 1887년 1월 23일 주일에는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세례 받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었다.

 

언더우드는 이후 “복음 전파자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임무를 받은 제가 어떻게 그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새문안교회, 최초의 조직된 교회

1887년에 이르러 수세 요구자 증가는 교회 설립의 요구로 이어졌다. 마침내 1887년 9월 27일 화요일 저녁, 언더우드의 사랑방에서는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오늘날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서상륜, 백홍준 두 장로가 택정된 한국 최초의 조직된 장로교회의 시작이었다.

물론 1884년 황해도 솔내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나 이는 한국인 평신도들의 공동체였다. 언더우드의 집에 모인 13명의 참석자는 서상윤의 전도로 만주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던 로스 목사로부터 수세를 받은 자들이었다. 이 자리에는 로스 목사도 언더우드의 초청으로 참석했다.

그들은 개척 선교사로서 감회와 감격을 나누었다. 언더우드는 ‘씨가 뿌려지는 곳마다 그 씨에 뿌리가 나서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 같다’는 글귀를 남겼다. 나머지 한 명은 그날 세례를 받았다. 새문안교회 설립은 한국인의 자발적 기독교 수용의 증거다. 여기에 언더우드의 목회자적 역할이 더해져 한국 개신교는 수용과 전래가 합일되어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서상륜은 생명을 담보한 만주의 봉천 영구부터 의주와 솔내, 서울을 거치며 권서인으로 활동했고 로스 목사의 성경 번역에도 관여했다. 그는 의주에 머무르지 않고, 물론 거기 안주할 수도 없었지만 솔내를 거쳐 서울에서 주로 권서 활동을 펼쳤다.

그는 서울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언더우드도 처음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서씨 가문에서 서경조를 비롯한 목회자를 배출한 것은 믿음의 전승이 잘 계대(繼代)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귀한 일이고 축복이다. 앞으로도 잘 계승되길 기원한다.

21개의 교회를 세운 언더우드

1887년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부의 제재는 없었다. 그러나 민간에서 소위 ‘영아소동’ 사건이 일어났다. 서양인들이 한국 어린이를 잡아 눈알을 뽑고 사진기 렌즈를 만든다거나, 간을 빼어 약을 만든다는 괴담이 난무했고 급기야 폭동으로 이어졌다. 서양인들은 신변의 위협을 받았다. 실제로 이화학당 정문 수위는 살해되기도 했다. 폭동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야 진압되었다. 이런 여파 탓에 1888년에는 새문안교회 신도 수는 50여명이었다. 이후 교세는 점진적으로 증가해 1889년 263명, 1901년 401명으로 성장했다.

1894년 청일전쟁 전후로도 선교활동은 자유로웠다. 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에 따라 새로운 교회도 개척교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893년에는 사평동교회, 1894년에는 현재의 서교동교회가 개척됐다.

새문안교회는 한국교회의 모교회라고 한다. 그 이름을 처음에는 정동교회라고 했다. 언더우드 사저가 있던 곳의 지역 이름을 따라 정한 이름이었다. 지금의 예원중학교 자리다. 1890년에는 돈의문을 오늘날의 경향신문 자리로 옮겨 ‘신문’, ‘새문’이라고 칭하여 교회명도 새문안제일교회(新門內第一敎會)라고 붙여졌다. 그 후엔 새문안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에는 자립으로 벽돌 건물을 세우고 1500여명이 모여 헌당예식을 가졌다.

언더우드는 이후 지금의 서교동교회, 영등포교회를 비롯해 총 21개 교회를 설립해 목회자로서 선교사의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했다.(계속)

 

최재건 전 연세대 신과대 교수(Ph.D. 하버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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